나의 결혼 원정기 – 3




원래는 여행을 가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한다!

라던 상황은 결혼을 할 수 있느냐로 바뀌면서 애매해졌습니다.

그래도 찔끔찔끔 자료 조사하고, 장비(라고 해봤자 배낭과 침낭, 자물쇠 따위…)를 트래블 메이트를 보면서 오프라인 매장도 가보곤 했습니다.  배낭은 합정역 코오롱 매장(없어졌죠..)에서 샀고..사실 그당시 제 카드 내역이 그런게 다였습니다..

정말 까보시지는 않았지만, 나름 자신 있는 상태였던거죠.

그전에는 술이나..게임이나.. 머…어른들께서 보시기엔 그냥 그랬죠

이런 교착 상태가 해소된 건 두 번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 해, 여자 친구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주에서는 장례 후에 귀양풀이라는 일종의 굿을 하는데, 그 굿에서 망자의 이야기를 듣거나 가족의 점을 같이 봐줍니다.

그 점에서 아버님께,  딸이 지금 만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결혼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무속의 나라!  갓덕을 보았습니다.

결혼 승낙을 받은 날 역시 많은 분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는습니다.

심지어, 미국인 예비 사위(그쪽도 나랑 같은 처지인..)도 있었는데..

영어를 못하시는 어른들 앞에서 넙죽넙죽 소주를 받아 먹으며, 어른들에게 “소주킹” “소주킹” 하더군요.

그래서 더 오바해서 술을 마시고,  실신했습니다….

이런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추가 품이 들긴 했지만 결혼을 하기로 하고, 상견례를 잡기로 했습니다.

….

제주에서 서울로 두 분이 미리 오셨는데,   지병을 있으셨던 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장례식에서 양가 부모님이 살짝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자친구 부모님이 저희 부모님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 결혼 준비 차 제주도에 갔을 때나, 상견례 때도 부모님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솔직히 저희 부모님은 내세울 만한 직업이시거나 재산이 많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반대로, 여자친구 집은…저희 엄마가 나중에 방문하시고, 솔직히 기가 많이 죽었다고 표현하실 정도로…좀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자수성가하신 여자친구 아버님은, 저희 부모님이 많이 착하시다고 계속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미뤄졌던 상견례도 양가 부모님의 만취 속에 서로 친구하기로 하며..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

결혼은 이제 속도전으로 접어들었고, 코엑스에 하는 결혼 박람회에 들어가서 플래너 한분 소개 받고 바로 나왔습니다.

연락 주고 받으며, 스드메에  ‘스’마저 무슨 필요냐 하고 생략했을 정도로 간단간단하게 넘어갔습니다.

(다만, 나중에 안 것은 그래도 친척들에게 보내는 선물 같은 것들은 양가 부모님들께서 알아서 준비하셨더라구요..)

예식장도 하루에 3군데 보고, 바로 3번째 예식장을 골랐습니다.

반지도 실반지로, 대신 백화점에서 사자! 하고 대충 마무리했습니다.

플래너 분이 아프셔서 연락이 잘 안되었음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드레스도 바로 후딱! 한복도 한번에 후딱! (저희 어머니가 파란색 입기 싫다고 당일에 다른 색 입고 온건 함정)

필요한 가족들과 저희 예복만 준비하고, 저희는 바로 이제야, 비로소 여행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결혼 1달전 이었던가… 예비 아내가 갑자기 미국 여행을 간다고 하더군요.

어머니와 어머니친구들과 미국 서부 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맥북을 사면 환율이 호시절이어서 좀 쌀 때라 제 맥북 구매를 부탁 했습니다.

이미 결혼자금이나 여행비용을 각각 내는 것이 아니라 공통 비용으로 처리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저한테 돈을 받길래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지만 돈을 주었습니다. …;

..본인 것은 맥 프로를 사왔더라구요…

소소한 황당함이었습니다.

결혼은 제주에서 한번, 서울에서 한번 해야 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잔치라고…하루 종일 음식점이나 연회장 빌려서 해야 한다고 하네요.

나름, 제주도 지역 신문에 광고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결혼하는 날, 동생과 회사직원 몇명이 오고 바로 갔습니다.

와준게 너무 고마웠지만 서울식으로 바로 식이 끝나는 게 아니라서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하루 종일 모르는 어른들과 사투리속에 이리저리 불러 다니며 절을 해야했습니다.

제주는 혼주와 당사자들에게 각각 축의금을 내는 구조더군요.  그래서 축의금이 몇 곱절로 나가는 구조이기에 회수도 그만큼 열심히 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지금은 다른 경조사에 참여하면서 적응이 어느 정도 되기도 했고 예전같진 않아서 많이 덜해지긴 했는데, 그 때는 많이 의아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불러 다니면 절도 하고, 술도 마시고, 뻘쭘하게 서 있기도 하다보니..

이제서야 실감이 나고 앞으로의 삶이 긴 여행만큼이나 생소한 경험이겠구나 했습니다.

막상, 서울에서의 결혼은 (시간상으로 비교도 안될만큼) 짧막했고 큰 임팩트가 남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출처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511652?od=T31&po=0&category=0&groupCd=#comment-point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