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츠 도보 배달 후기




저는 정말로 크리스마스에 알바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제는 했습니다. 강남의 한 와인바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수많은 커플들이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드는 동안 저는 찬물로 설거지를 했습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 후기를 쓸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이자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혹은 이른 점심)을 먹고 당근으로 아이쇼핑을 하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버스를 타고 거래를 하러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집에 돌아오기가 살짝 아쉬워서 카페에서 책을 좀 읽다 들어온 것이 오후 3시를 좀 넘어서였습니다.

예전에 부업이라도 해볼까 해서 쿠팡이츠 배달파트너 일을 알아봤었습니다. 안전교육을 이수하고 첫 배달을 완료하면 보너스로 2만원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교육을 듣고 보온가방까지 마련했습니다만, 도보 배달은 콜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사는 곳이 주택가 근처다보니 주문이 좀 뜸한 것도 있었겠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앱을 켜고서 한참을 기다려도 단 한 콜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없는 뚜벅이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결국 포기하고 보온백은 구석에 처박아둔 채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쿠팡이츠 배달 앱에서 이벤트 메시지가 날아왔던 것입니다. 연휴기간인 22일부터 25일 사이에 도보로 15건을 배달하면 5만원을 보너스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도 왔던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달앱을 켜고 배달가능상태로 바꿔보았습니다. 다음순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동네 피자집에서 배달콜이 들어왔습니다. 콜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어쩌지 하다가 쿠팡이츠 배달 시스템을 잘 몰랐던 터라 제가 수락해도 다른 배달기사분들이 먼저 선정되지 않을까 싶어서 수락을 눌러봤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픽업대기 상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취소를 누르려고 해도 취소버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취소가 가능한 것을 알았지만 취소를 하면 페널티가 쌓이는 구조였습니다) 이를 어쩌지 하다가 서둘러 외투와 보온가방, 그리고 핸드폰만 챙기고 피자집으로 향했습니다.

피자집에 도착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쿠팡이츠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직원분이 몇 번이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앱을보고 384번입니다. 했더니 직원분이 그건 우리 주소고요, 코드번호 알려주세요. 했습니다. 조금 민망했지만 다시 코드번호를 찾아서 불러드리니 직원분이 포장된 피자를 주면서 기울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했습니다.

피자집에서 배달지까지는 대략 1km 정도 되었습니다. 성인남자가 걸어서 1시간에 4km 정도 간다고 치면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문제는 외출하고 집에 막 돌아왔던 터라 핸드폰 배터리가 20프로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앱에서 제 현재위치를 계속 확인하다보니 배터리가 더 빨리 소모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이라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피자가 식을 것만 같아서 배달지까지 최대한 빨리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피자의 수평을 유지하려다보니 역시나 쉽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첫 배달지에 도착하고 보니 요청사항에 벨을 누르지 말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배달이 완료되면 배달음식과 배달지 현관의 호수가 같이 담기게끔 사진을 찍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첫 배달을 마쳤구나, 하고 안도하며 배달완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또 콜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엇, 안되는데 하면서 지도를 보니 바로 근처의 다른 피자집이었습니다. 핸드폰 배터리가 15퍼센트 정도 남았던 터라 살짝 고민되었지만 하나만 더 하자, 하고 수락을 눌렀습니다. 두번째 피자집에는 카운터에 이미 포장이 완료된 비닐봉투가 놓여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피자가 아니라 스파게티와 음료수가 전부인지 양이 작았습니다. 다시 1km 정도를 걸어 두번째 배달지에 배달을 완료하고 나니 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 티셔츠가 다 젖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만할까, 하고 무심코 배달완료를 눌렀는데 바로 또 콜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배달 중에 배차종료를 체크하면 배달이 완료된 이후에는 콜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배차종료를 체크하지 않은 상태라면 콜이 계속 들어오는데, 이걸 거절하면 그게 또 이력이 남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배달은 오징어회를 근처 호텔로 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청사항에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호텔 근처에 가니 입구에서부터 몇 쌍의 연인들이 호텔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체크아웃이라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 아마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부럽다기보다는 그들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출산시대에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애국의 시작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한 커플이 나오다가 저를 보고 걸음을 멈춰 서더니 ‘혹시 오징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서 네? 했더니 남자쪽에서 웃으며 배달 맞으시죠? 했습니다. 아 네, 하면서 호텔 문 앞에서 오징어회를 건네주려니 조금 그림이 그랬습니다만 꿋꿋이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징어회만 찍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커플은 오징어회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세 번째 배달까지 마치니 핸드폰 배터리가 7%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리도 슬슬 아팠습니다. 잠깐 쉬면서 배터리도 충전하고 체력도 보충할 겸 근처 PC방을 찾았습니다. 핫도그와 주스를 시켜 먹으면서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노곤해지면서 잠이 몰려왔습니다. 모자를 쓴 채로 모니터에 인터넷 창 하나 띄워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이건 뭐 영락없이 예전 PC방 알바 때 제가 수상하게 봤던 아저씨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배달앱을 켰습니다. 도보배달은 배달기사의 현재 위치에서 픽업지까지의 거리 + 픽업지에서 배달지까지의 거리를 기준으로 배정되는데, 이 거리가 도합 1.5km 정도이내일 때에만 콜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PC방에서 어느 정도 체력보충을 하고 다음 콜을 기다렸습니다. 꼬막전문 식당의 네 번째 배달을 마치고 나니 이번에는 탕후루집에서 주문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탕후루는 가벼운 데다가 겨울이어서 녹을 일도 없으니 배달하기에 아주 편했습니다. 탕후루 배달지는 어느 오피스텔 건물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 옆에 각 세대별 전기세가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1만원에서 2만원 정도였는데 한집만 유독 사용료가 4만 원이 넘어 눈에 띄었습니다. 분명 4090 유저였을 겁니다.

탕후루 다음은 마라탕을 배달했습니다. 이때 배달음식 중에는 국물요리가 제일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국물을 흘려서도 안되니 수평유지에 각별히 주의해야 했습니다. 배달지는 30층 정도 높이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배달지가 10X동 1702호라 10X동의 입구에서 해당 호수의 호출버튼을 누른 후 조금 기다리자니 공동현관이 열렸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에 올라갔는데 1703호, 1704호, 1705호가 있고 1701호와 1702호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에 입구가 두개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1,2호 라인의 입구는 건물 반대편으로 돌아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3,4,5호 라인 입구에서는 1702호 호출이 되지 않아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호출시스템 설계자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2호 입구에서 1702호 호출버튼을 다시 눌렀습니다. 17층에 올라가 음식을 두고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면서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음식을 받아갔습니다. 안쪽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남자도 애국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라탕을 배달한 아파트단지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터라 잠깐 집에 들러 땀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오늘 한 배달 내역을 살피고 있으려니 또 몸이 나른해지면서 오늘은 이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날치고 경험도 충분히 쌓았고, 오래 걸어서인지 다리도 좀 아팠습니다. 하지만 15건 배달시 5만 원 보너스를 놓치자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배달 1건당 보통 3~4천 원 정도를 받는데 15건에 5만원 보너스라는 것은 배달료를 두배로 받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 9번만 더 해보자! 하고 다시 앱을 켜고 배차대기 상태로 변경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콜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보조배터리와 이어폰까지 챙겨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쥬다스 프리스트의 Delivering the goods를 들으면서 픽업지로 향했습니다. 커피 주문이 아닌 빵 종류 주문이라 배달은 아주 편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로 초밥 배달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었습니다. 다음 배달은 KFC 치킨 배달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배달지가 근처 ㅇㅇ동의 주민센터였습니다. 도착 후 전화를 달라는 요청사항이 있어 처음으로 주문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젊은 여자가 받더니 치킨이죠? 현관 앞에 두고 가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 꺼진 주민센터 현관에 치킨을 두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마 당직근무자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현관에 두고 가라고 할 것이면 굳이 전화를 달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했습니다.

반나절을 걷기만 하다보니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걸음이 무척 빠르십니다. 성격도 조금 급하시지만요. 평소에 어머니께는 가끔 전화를 드려도 아버지께는 전화를 거의 드리지 않는데, 오늘은 무심코 아버지 번호를 눌렀습니다.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

밖에 있다가 그냥 전화 드렸어요. 알바하고 있어요.

무슨 알바?

배달 알바에요.

배달?

네, 오토바이 타는 거 말고 걸어서 하는 거라 위험하지 않아요. 운동삼아서 하고 있어요.

차조심해라.

네.

여자친구도 만들어야지?

노력해야죠.

착하다.

그렇게 아버지하고 통화를 끝내고 나니 저도 배가 고파져서 다시 KFC에 갔습니다. 단백질과 당 섭취가 시급했습니다. 대충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앱을 켰는데, 어쩐 일인지 콜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배달 알바를 하다가 콜이 들어오지 않으면 길 위에서 그냥 시간을 까먹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 배달 같은 경우야 콜이 계속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도보 배달은 주문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인지 이렇게 배달콜을 받기까지 기약없이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이제 여섯 번만 더 채우면 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니 다행히 근처 초밥집에서 주문 콜이 들어왔습니다. 초밥 배달을 마치고 나니 우려했던 대로 콜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 역시 하루 15회는 무리인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터벅터벅 거리를 걷고 있자니 아까 픽업했던 커피숍에서 다시 배달콜이 들어왔습니다. 배달지가 집에서 아주 가까웠습니다.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싶었습니다. 15회 보너스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쉬웠지만, 콜이 점점 뜸해진 데다가 너무 피곤해서 더 하는 것은 조금 무리인듯 싶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배달은 케이크였습니다. 생일 케이크인지 직원분이 포장하면서 초도 챙겨 넣더군요. 케이크도 녹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보온가방에 넣지 않고 상자 그대로 들고 갔습니다.

하루종일 걸었더니 발에는 물집이 잡힌 것 같고 종아리도 아프고 그랬습니다만, 마지막 배달로 생일케이크라니 뭔가 기분이 묘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축하드려요, 하면서 배달지에 도착하니 이런, 4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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