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이슈는 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의 실무를 준비하는 일은 간단했습니다. (응?)
시간이 없었기에 큰 문제 없음 오케이 오케이..하고 넘어가기로 했고, 실제로도 대부분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가령, 집 구하는 것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이슈 거리가,
그냥 지금 여자친구가 살고 있는 빌라에서 신혼 살림을 꾸리기로 하니 그냥 끝이었습니다.
게다가 혼수를 할 필요도 없는 게, 결혼 즉시 여행으로 집을 비울 예정이어서…
오히려 그 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더 이슈였습니다.
그 전에 앞서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제가 여자 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여자친구는 제주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커플에 비해, 자연스레 부모님을 뵐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
그래도 딱 한번 있었는데..
결혼을 준비하기 한두 해 전, 여자친구를 포함해서 여러 명이 제주도에 놀러 가서 저녁 한 끼 얻어 먹었습니다.
남녀 친구들이 같이 어울렸던 단체 자리여서 저 역시 친구로 위장을 했습니다만, 어머님은 저를 알아보고 계셨습니다.
제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은 저를 뚫어져라 노골적으로 관찰하셨고, 아버님은 간만에 돌아온 딸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넘쳐 나는 횟감과 싱싱한 제주 해산물을 즐기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긴장한 저를 은근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사실 비린 걸 잘 못 먹어서 해산물을 잘 못 먹습니다.
또, 이미 갈치 뼈 멋지게 바르기 실패, 딱새우 까기 실패, 긴장으로 많이 먹기 실패로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믿음직한 사위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일념에 처음 보는 생선, 자리를 뼈째먹기 시작했습니다.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모른 채 와그작 입에 넣어 씹었고, 맛을 느끼기 전에 한라산 소주를 부었습니다.
말없이 어머님은 자리회를 더 제 앞으로 미셨고, 연거푸 두 세 마리의 생선은 제 뱃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아버님은 요즘 제주에서도 자리는 내장 제거하고 먹어야 한다고 하시고,
참이슬을 주문하셨습니다.
이제 친국들은 대놓고 저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
아버님은 엄하시기도 하셨지만,
딸을 정말 너무나 많이 사랑하셨고 그 걸 숨기지 않으셔서 아직도 공주라고 부르고, 볼에 뽀뽀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자친구는 제 존재를 숨겼습니다.
집요한 질문과 검증, 그리고 그 절차를 통과했을 때는 빠른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란 확신이, 연애를 몇 년 넘게 하면서도 그녀를 계속 ‘비혼주의자’로 남게 하였습니다.
어찌됐건,
나의 세계 여행기 -2 : 클리앙 (clien.net)
이런 이유로
그 장애물이 없어진 것이고, 이제 아버님에게 저를 소개 시켜야 했습니다.
즉, 결혼을 허락하신 건..어머님 뿐이었습니다. ‘자리’ 효과로 그래도 어느 정도 합격이었나 봅니다.
이제 , 장인 어른이 되실 남자 어른과 처음 조우하게 되는 그 순간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스포지만, 제가 딸을 낳아 탯줄을 자를 때, 언젠가 저 역시 그 순간이 올 것이란 걸 떠올렸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 경험이 워낙 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 아마도 장인어른 역시 딸을 키우면서 그 순간이 도래할 거란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
추석 연휴, 동생과 코파면서 누워서 티비보다가 엄마한테 등짝과 함께 세계 여행이니 머니 그것도 부지런해야 하지..!!
한 소리 듣고 다음날 제주행 비행기를 끊었습니다. 양복에 배낭, 한 손엔 전날 허겁지겁 산 한우 세트를 들고 무작정 제주도로 갔습니다.
백화점에서 한우를 사면서 미리 여자친구에게 이야길 했더니 지금은 기회가 아닌 것 같다 라고 만류 했고, 다시 그래서 누우려고 했는데…이번엔 저희 엄마한테 썅욕을 들었습니다.
양 쪽에 더 정보를 공유해 봤자 좋을 게 없다란, 이후에나 느낄게 될 고부간의 낀 남편의 처세를 한 치 정도 느끼고..
저는 공항에 갔습니다.
가면서, 여자친구가 왜 여전히 이런 스탠스인지 좀 짜증이 나기도 했었는데요.
나중에 듣고 보니, 한산한 저희 집의 추석과는 달리 ‘처가’의 추석은 집안일의 연속이었는데,
이제 숨 좀 돌릴까 하니 갑자기 ‘사위’가 되겠다고 서울에서 누가 온다고 하니, 메인 이벤트가 늘어난 것이었죠
추석 음식 준비하던 집을 다시 대청소를 해야 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침 비행기를 탔음에도 늦은 오후가 되서야 여자친구를 만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2층 거실에서 팬티 바람으로 TV 보시던 장인어른이 한 번 힐끗 보시더니, 계속 TV를 보십니다.
지난 번 놀러 온 친구가 놀러 왔나 생각하셨고, 저 역시 뭔가 적극적이진 못한 어정쩡한 상황이었습니다.
간신히 벽에 등을 데고 살짝 앉았습니다.
TV에서는 야구를 하고 있었고, 마침 흥미로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LG였던 것 같은데, 2루 도루를 한 주자가 타이밍상 아웃인데 세이프 판정이어서…
아 이건, 아닌데.. 리플레이를 여러 각도에서 돌려 보면서, 흠…애매한데…라고 생각할 쯤
“추석에 이렇게 옷 차려 입고 제주도까지 그냥 야구 보러 오진 않았을거고!!”
지나가시던 어머님이 정신 차리라고 눈치를 주시고 나서야 제 정신이 돌아와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누군지, 어떤 목적인지…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입은 다른 생물체인 것 마냥 계속 멈추질 않았습니다.
결혼 허락을 구하러 왔다고요. 끈적한 정적이 길어졌습니다.
갑자기 아버님은 옷을 입으러 방에 들어가시고 말끔히 차려 입으신 후
아까와는 달리 정좌를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라고, 이 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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