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월드, 그리고 최강의 7인
90년대 초중반, 패미컴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후부터 게임 좀 하는 친구들 사이엔
RPG 붐이 일기 시작했다.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선봉으로
드래곤볼, 천지를 먹다, 라그랑쥬 포인트 등이 이당시의 대표적 인기작.
허나 이런 게임들을 즐기는 데 있어, 거대한 진입장벽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으니, 바로 일본어의 압박ㅡ
재일교포 2세가 아니고서야, 대한민국의 흔한 초등학생들 입장에선
그 외계어들이 히라가나인지 와루바시인지 알 길이 없었던 것.
그리도 가엾은 중생들을 위해, 이 땅의 뜻 있는 어른들은 구원과도 같은 경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 찬란한 이름 하야, <게임월드>
(게임계의 종합 매거진이었던 게임월드)
진정 이맘때의 어린이 게이머들에겐 가뭄 끝 단비와도 같은 잡지였다.
기종별 신작 소개, 인기작 공략이 게임월드의 주요 컨텐츠였는데, 그 구성이 제법 알찼다.
특히 RPG 게임을 공략할 때는 단순한 진행방법 외에도 주요 스토리, 배경 등에 대한
충실한 해설을 실어놓았기에,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주곤 했다.
일단 신간이 나왔다 하면 애들은 앞다투어 문방구로 달려가서
패미컴 관련 페이지들만 복사해왔고, 그 흑백 A4 용지들을 매뉴얼 삼아 그동안 못깨본
게임들을 클리어하곤 했다. 필자 역시 드래곤볼 Z 시리즈, 파이날 판타지 3 등의
엔딩을 보기까진 게임월드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허나 이렇게 훌륭한 양반들이, 전국 수천 수만 패미컴 유저들의 뒤통수를
한 번 후려쳤던 일화가 있다. 바로 <최강의 7인> 공략이 그것ㅡ
(패미컴 후반기의 ARPG 히트작이었던 패미컴 점프 2 : 최강의 7인)
간단리뷰에서 한 번 다뤘고, 직접 공략도 해놓은 게임.
반다이에서 1991년에 내놓은 액션 RPG 타이틀이며, 손오공을 비롯한 일본 점프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화제가 됐다. 재미/분량/완성도에서도 떨어질 것 없는 수작.
우리 나라에도 꽤 많은 수량이 보급됐고,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미 알 만한 친구들은 다 알고 있던 게임이었다.
문제는 역시나 일본어ㅡ 허나 우리에겐 게임월드가 있지 않던가.
(게임월드의 최강의 7인 공략 – 10년전쯤 우연히 스캔본 파일을 구했다)
정확히 몇 호에 실렸는지는 모르겠다만, 대략 필자가 5학년때쯤 나왔던 기억.
여튼 이 공략본을 얻으면서부터 비로소 각 잡고 패드를 쥐었고,
대망의 <최강의 7인> 클리어에 도전하게 되었더랬다.
(초반 진행에 필수적인 내용은 물론, 배경 스토리에 대한 해설도 실려있다)
7명의 주인공을 한 명씩 영입해나가는 과정이 초반 스토리 진행의 핵심인데,
각 단계마다의 상세한 공략과 설명이 매우 잘 되어있다.
또한 그 재미가 굉장하여 파판3 했을 적 만큼이나 집중했었고,
경험치 노가다에도 꽤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점차 글이 짧아지고, 그 내용도 부실해지기 시작한다)
허나 게임의 중반, 즉 7명의 캐릭터가 모두 모인 이후부터의 본격적 전개부터는
그 설명이 점차 날림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문장 자체도 짧아지고, 내용도 애매)
그리고 이맘때쯤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으니, 바로 ‘세라’라는
마을에 있다는 ‘쉘터’의 위치. 공략본엔 이렇게 써있다.
…주민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란드라는 사람이 쉘터라는 것을 지어
위험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쉘터란 어디에 있을까?
대피소인만큼 마을 중앙에는 있을리가 없다. 쉘터를 찾아 그란드를 만나면…(후략)
그래서 쉘터가 어디냐고???
팩으로 할 당시, 필자 이상으로 RPG에 빠져있던 절친과 함께 이 대목을 해석하느라
몇날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다. 마을을 아무리 뒤져도, 마을밖 맵을 한 칸씩
다 수색해봐도 도무지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할 따름.
(우연히 찾은 쉘터의 위치 – 저런 곳에 숨겨놓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가)
거의 포기 직전, 필자가 별 생각 없이 누른 방향키 덕분에 극적으로 찾아낸 쉘터!
둘이 아주 박수치고 끌어안고 난리를 쳤다.
어쨌거나 일단 한 고비는 넘겼고, 그때부턴 급격히 못미더워진 공략본으로
여기저기 비벼가면서 대망의 엔딩에 한 발자욱씩 다가서게 된다.
(이보시오 기자양반!)
캡슐도 얻고, 지하철도 타고, 카린탑도 오르락 내리락 하고, 마침내 근두운까지 얻으며
클리어에 거의 다가간 시점에, 이놈의 공략본은 청천벽력과 같은 멘트를 친다.
…이제 그것을 갖고 카린에게 가면, 약속대로 근두운과 선두 주머니를 준다.
이것을 가지고 화염을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모험에 힘을 기울이자. (공략 끝)
??????
뭐 어쩌라고? 어떻게 하라고?
무슨 힘을 기울이라고?
이후의 내용에 대한 아무런 언급, 하다못해 힌트 하나 던져주지 않은 채,
게임월드의 <최강의 7인> 공략본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인터넷도 없고, 주변에 일본어에 능통한 친구도 없었던 필자와 절친으로선
깊은 절망과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던 상황. 애초에 시작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건 뭐 75% 가량 깬 상황에서 뚝 끊어버리니.
기자가 쓰다 귀찮았는지, 2회로 나눠 공략하려다 상부 허락을 못받았는지,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게임월드에게 가져왔던
무한한 신뢰와 호감이 한 방에 산산조각났던 사건이었다.
여튼 필자와 <최강의 7인>과의 첫 인연은 그렇게 끝나버렸고,
끝내 엔딩을 보지 못했다는 한(恨)만 간직하게 된다.
다행히도 세월이 한참 지나 인터넷, 에뮬, 그리고 제대로 된 공략본을
손에 넣은 덕에, 늦게나마 궁금했던 엔딩을 보긴 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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